Disce aut discede

11.01.21 계속 변죽만 울리네

Gruentaler 2021. 1. 12. 21:07

 Ulrich von Hehl / Friedrich Kronenberg (Hrsg.), Zeitzeichen. 150 Jahre Deutsche Katholikentage 1848-1998 (1999)에 실린 논문 두 편. 두 논문 모두 분량이 많지 않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라 특별히 논문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독일 가톨릭대회 150주년 기념 논문집이라고 해서 행사 관련 자료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듯 싶고.

 아무튼 두 논문을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노동자 보호나 빈민 구제와 같은 목적에서 시작된 가톨릭 교도들의 종교-자선적 단체들은 한편에서는 통일 이후 개신교와 함께 이룬 한 국가에서 자신만의 사회환경과 정체성을 만드는데 상당부분 기여하였고 (Damberg) 다른한편으로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도모하는 식으로 단체들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Gabriel) 이러한 모습들은 독일 제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소수의 위치에서 비롯하여 단순히 수세적인 입장에서 자기 변호만을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변혁상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듯. 

 

 1. Gabriel, Karl, Sozial-katholische Bewegung

 

 19세기 산업화에 따라 가톨릭 교도들은 협회 설립을 통하여 자선복지 활동에 참여. 국가의 공적 빈민구제/복지 제도와 나란하는 수준의 방식을 민간 영역에서 구축하였음. 산업사회라는 변혁에 대한 나름의 대응? 하지만 오랫동안 단순히 종교적-자선적 차원에서만 그쳤음. 사회복지, 사회국가라는 틀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리고 가톨릭주의 안에서도 오랫동안 자선에 집중하는 쪽과 근대화에 집중하는 쪽으로 양분. 노동자 복지 단체 사무총장 힛체가 이 문제를 정리하면서 - (개별 노동자의 고결함과 경제적 생계 유지라는 목표달성을 위한) 사회복지라는 국가의 역할과 과제 역시 국가가 신을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론으로 뒷받침하여 - 후자쪽으로 일단락된듯. 

 즉 종교, 자선적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사회, 정치적으로 상당한 학습과정을 통해 국가의 시장 개입과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익 조정이라는 의무를 강조하는 "사회 자본주의" 컨셉으로 이동하였다. 

 

 2. Damberg, Wilhelm, Bildung und Auflösung des "Katholischen Milieus"

 

 19세기와 20세기 독일에서 가톨릭 사회환경(Milieu)의 형성과 해체 과정을 짧게 조망한 논문. 짧은 분량인만큼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다루다보니 절반 정도는 논문과 직접 관련이 없었다. 요약하자면 영방 국가 시절 개별 국가의 종교적 자유 원칙에 따라 보장 받았던 기존 가톨릭 교도들의 생활상은 통일과 함께 위협을 받았으나 협회를 통해 사회환경을 조직함으로써 이에 대응할 수 있었고, 근대 사회에 나름의 제 몫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환경은 1차 세계대전까지 유지가 됐지만 전쟁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 민족사회주의의 대두와 그에 따른 외부의 압력이나 교회 내부의 움직임(피우스 11세의 개혁프로그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을 통해 사회환경은 협회/속인 중심에서 성직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소멸되었는가? 그렇다기보다는 이제 완전히 제 몫을 다하고 자연스럽게 (독일) 사회에 녹아든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듯. 사회주의의 발전상과 여러모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도 지적. 

 

 비록 프로이센이 자기 이미지에 따라 가톨릭 교도들을 억압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국가 안으로 통합하려고 했었으며 반대로 가톨릭 교도들은 한번도 새로운 국가 수반에 충성의 의무를 의심한 적이 없었겠지만 상대방의 법 시스템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교회와 국가, 사회의 통일을 통해 각인된 특성을 지닌 지역에 이제 사실상 모든 종교를 포괄하고 그에 따라 '근대적인' 국가로 통합하기 위하여 순응할 수도 있을 모델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에는 침묵하였다. (S. 128)

 

 48년 혁명이 실패하긴 했으나 교회의 자유라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가톨릭교도들만의 사안은 아니지만 협회나 결사단체에 대한 생각은 이들에게도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결국 사회환경soziales Milieu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함. (S. 128f.)

 

 그리고 그 사회환경은 종교국가의 후신으로 가톨릭 교도들의 사회화 형식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종교문화적 측면에서 동일한 생활환경이 무너지긴 했어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변화의 가속 중에도 확고한 사회환경은 두 기능을 떠맡았다. 1. 가톨릭 교도들이 사회적 큰 집단으로서 더 이상 전통적이지 않고 대신 종교적 의미규격이라는 조직화된 매개로 자신들의 단결과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2. 실제로 자기 조직화된 사회적 부분 자율성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자신들만의 의미 안에서 - 사회 부양, 교육, 문화 - 이 근대 사회를 만드는 요구를 제기했다. 사회 문화적 탈조직에 맞선 수세적 기능과 사회 변동 속에서 공세적 특성 요구가 함께 작동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주의 운동과도 유사한 점이 있는데, 국민국가와 산업 혁명을 둘러싼 논쟁 안에서 등장하여 사회 환경 구조 중심에서 정당이 만들어졌고, 이 정당은 독자적인 사고를 확산시키고 단결을 수호하면서

동시에 사회 변혁의 도구로 작용했기 때문. (S.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