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월에 읽은 책
1.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캐나다 갔다가 새해 첫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읽은 책. 본인이 책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소위 달리기 전도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참에 “나는 왜/어떻게 글을 쓰게 됐는가/쓰고 있는가”를 달리기를 통해 성찰하는 책에 가깝다고 봐야할듯 싶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달리기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해가 됐으니 나도 슬슬 다시 나가서 달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돌아와서 달리기를 했냐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
생각해보면 하루키 책은 고등학교 때 읽은 뒤로 근 20년만에 처음이었다. 하루키 작품이 내 취향이 아니었던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팔 한 쪽에 흑염룡 좀 키워볼까 하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기 싫어서 안읽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소설이 아닌 수필을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게 잘 읽었다.
계속 달려야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116)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인내가 필요하다. (122)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견뎌 나가’는 사이에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나기도 한다. (125)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접근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258)
2. 루이즈 페니, 힐러리 클린턴, 스테이트 오브 테러
가마슈 시리즈의 페니와 미 국무장관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두 사람이 합작으로 쓴 스릴러 소설. 주인공이 여성 국무장관인만큼 힐러리가 상당히 많이 투영되어 있고, 여기에 누가 봐도 트럼프와 누가 봐도 푸틴인 인물도 등장하니만큼 이런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으나 적지 않은 분량에도 긴장감을 풀 수 없었기에 - 페니의 가마슈 시리즈 보다는 템포가 빠른 느낌 - 개인적으로는 호에 가까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여성 국무장관을 다룬 (힐러리 역시 본인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던) 미국 드라마 “마담 새크레터리”도 많이 떠올랐고. 그나저나 하루키 책과 더불어 캐나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이야기가 서울에서 시작해서 돌아오는 길 경유지였던 프랑크푸르트로 이어졌다보니 어쩐지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힐러리와 함께 쓴 인물이 페니인 만큼 본인 작품의 인물들과 스리 파인스도 깨알같이 나오니 페니 팬이라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음.
3. 니클라스 루만, 근대의 관찰들
이젠 슬슬 이런 책들하고도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집어들어 읽었지만 역시나 여전히 소화하기 힘든 책. 이렇게 한줄로 쓰는 것도 사실 정말 많이 부끄러울 따름.
4. Wendy Warren, New England Bound
북아메리카에서는 남부의 노예제와 북부 뉴 잉글랜드의 자유민 체제가 평행선처럼 진행되다가 결국 내전으로 끝을 보고 말았다는 게 통념이지만 실은 뉴 잉글랜드에서도 식민지 개척 초창기부터 노예제가 존재했고, 심지어 카리브해 등을 거쳐 끌려온 흑인 노예 외에도 전쟁 포로 등으로 잡은 원주민도 노예로 만들어 이들을 교환하는 일종의 중개시장역할도 하였음을 밝히고, 종교와 젠더같은 사회 제요소들이 그 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명하고 있다.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고 논지도 설득력 있어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문제는 어디 나가는 길에 틈틈히 읽었던 원서다보니 거의 석달에 걸쳐서 읽었고, 그래서 놓친 맥락들이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함.
5. 이영석,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
최근에 돌아가신 이영석 선생님의 책. 본인 전공이 영국 사회사였던 만큼 영국 사회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사학자들의 주요 저작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 마지막에는 한국 원로 서양사학자 두 분도 다루고 있음. 다루는 인물들은 홉스봄이나 톰슨과 같이 번역을 통해 널리 알려진 연구자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낯선(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말미의 국내 역사학자들도 포함하여) 연구자들을 더 많이 다루어서 나야 좋긴 하지만 이쪽 분야 잘 모르는 독자들한테는 의외로 장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만큼 뭔가 독일사 버전으로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저의 내공은 참으로 일천할 따름이지요… 생각해보면 이 동네에서는 벨러가 이미 하기도 했고.
6. 토마스 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이별은 기나긴 장이었지만 재회는 짧은 소절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미완으로 남지요!
»einen Abschnitt macht die Trennung. Wiedersehn: ein klein Kapitel, fragmentarisch.« (Kap. 9.)
사실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는 몇 년 전 한국가는 비행기에 들고 타서 읽었는데 거의 종반부까지 토마스 만 특유의 그 투머치토크를 보고 에잉 역시하며 혀를 찼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각잡고 읽고 덮은 적이 있었다. 그때 왜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읽어봤다.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당신한테 말하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곧 제물이자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야. 한때 당신을 향해 불탔고, 지금도 언제나 당신을 향해 불타서 정신과 빛을 발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만물의 형태 변화는 당신 친구인 내가 가장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원대한 소망이자 가장 절실한 욕구야. (……)
사랑하는 이여, 사물은 제각기 분리되어 생겨났다가 서로 교환하고 뒤섞이면서 통일성을 유지하고,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고도 인륜에 합당한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그래서 과거가 현재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나고, 현재는 다시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미리 내비치며,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는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미래로 충만해지는 것이지. 과거를 되새기는 감정, 미래를 예감하는 감정, 그런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해. 우리 자신을 향해 눈을 뜨고, 세계의 통일성을 볼 수 있게 눈을 크게 떠보자고. 눈을 크게, 즐겁게, 지혜롭게 뜨는 거야.
Alte Seele, liebe, kindliche, ich zuerst und zuletzt bin ein Opfer–und bin der, der es bringt. Einst verbrannte ich dir und verbrenne dir allezeit zu Geist und Licht. Wisse, Metamorphose ist deines Freundes Liebstes und Innerstes, seine große Hoffnung und tiefste Begierde, (……)
Einheit, Geliebte, das auseinander Hervortauchen, das Sich Vertauschen, Verwechseln der Dinge und wie Leben jetzt ein natürlich Gesicht, jetzt ein sittliches zeigt, wie sich Vergangenheit wandelt im Gegenwärtigen, dieses zurückweist auf jene und der Zukunft vorspielt, von der beide schon geisterhaft voll waren. Nachgefühl, Vorgefühl–Gefühl ist alles. Laß unsern Blick sich auftun und unsre Augen groß sein für die Einheit der Welt–groß, heiter und wissend. (Kap. 9.)
다시 읽으니 안그래도 피곤한 비행길에서 투머치토크에 진작에 질린 나머지 앞부분에서 내가 놓쳤던 것이 적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한 명의 천재가 등장하기 위해 그 주변의 범인들은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양측의 생각을 근성으로 진지하게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로테를 통해 진정한 독일(민족)예술 내지 독일(민족)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 괴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천재적인 능력으로 문학과 예술을 통해 국민성을 마련했다며 찬양하고 자신도 여기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천재성이 자신들의 기대처럼 독일 -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우는 -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 속 독일(인)“으로 향했기에, 보다 1차적으로는 그 천재라는 한 인간의 실상에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 하지만 이런 딜레마를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그 “로테”가 바이마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몰려와서 “당신은 이런 말 하는 내 마음 잘 알지?”라며 속된 말로 거의 답정너 식으로 로테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이런 고해성사와 같은 온갖 푸념을 로테는 들어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상처받은 사람은 조롱도 감수해야”한다면서 일일이 품어주었고, 괴테는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아무튼 마이 웨이를 고수하며 변호한다. 결국 이런 괴테의 자기 옹호와 그 주변의 범인들이 갖는 딜레마를 통해 망명지의 토마스 만은 은연중에 나치 치하에서 독일(예술)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 울분을 표하며 그 정수를 어떻게 지켜야 할 지 성찰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과연 토마스 만은 이런 딜레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기도 하고. 하여튼 파우스트 박사도 그렇지만 이 양반 이래저래 괴테 엄청 신경쓰면서 살았구나 싶음.
나는 내 방식대로 독일정신을 추구하는 거야. 그들은 나한테 속물근성 어쩌고 하지만, 바로 그들 자신의 악의적인 속물근성과 함께 그들을 악마가 데려가라지. 자기네들이 독일이라고 우기지만, 내가 곧 독일이야. 그들의 독일은 송두리째 파멸했고, 독일은 나를 통해 존속해온 거야. 어디 나의 독일을 거부하겠다고 마음대로 굴어보라고. 그래도 내가 너희를 대표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천성적으로 대표자이지 순교자는 아니야. 비극보다는 화해가 훨씬 더 내 천성에 맞아. 나의 모든 활동은 화해와 절충이 아니던가? 나의 관심사는 이쪽과 저쪽 모두를 긍정하고 용인해서 유익한 결실을 거두고, 균형을 맞추고 화합을 이루는 것이잖아? 만인의 힘을 합쳐야 비로소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 그러니 개개인의 힘도 소중하고 계발할 가치가 있고, 모든 소망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완성되지. 개서오가 사회, 의식성과 소박함, 낭만주의와 실용주의? 어느 한쪽이 아무리 완벽하다 하더라도 양쪽을 모두 받아들이고 통합해야 전체가 되고, 그러니 개별 원칙의 독주를 경계하면서 완성해나가야지. 그리고 또다른 원칙인 휴머니티를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 자산으로 삼되, 자칫 오도되기 쉬운 이 최고의 모범을 은밀히 그 자체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패러디하는 거야.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유쾌하게 양쪽 모두를 배반할 정도로 상대화하는 것이지. 그러면 비극은 제어되고 사라지는 거야. 아직 장인정신이 승리하지 않아도, 나의 독일정신이 승리하지 않아도, 나의 독일정신은 그러한 다스림과 장인정신에서 대표적으로 구현되지. 독일정신이란 자유, 교양, 전방위성, 사랑이니까. (……)
내가 원하는 것은 생산성, 여성성과 남성성의 겸장, 수태할 수 있는 생식능력, 타자를 나한테 맞게 수용할 줄 아는 고도의 능력이지. (……) 그러니 내가 곧 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형이고 본보기인 거야. 세상을 수용하고 세상에 베풀면서, 생산적인 것이면 무엇이든 경탄하며 가슴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중재하는 자세로 이성과 사랑, 정신활동을 통해 대법해져야 해. 정신활동의 역할은 곧 중재니까. 독일인은 그래야 하고, 그게 곧 독일인의 소명이야. 우리만 독창적인 민족이라고 마음을 닫으면 안되지. 그건 몰취미한 관점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을 숭배해서 어리석어지는 것이고,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거야. 언젠가는 화를 자초할 불행한 민족이야.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까. 그릇된 자기인식은 세상의 비웃음을 살 뿐 아니라 세상의 미움을 사고 극단적인 위험을 자초하지. 틀림없이 독일인들은 혹독한 운명을 겪을 거야. 스스로를 배반하고, 본분을 잊고 설쳐대니까.
Ich hab mein Deutschtum für mich–mag sie mitsamt der boshaften Philisterei, die sie so nennen, der Teufel holen. Sie meinen, sie sind Deutschland, aber ich bins, und gings zu Grunde mit Stumpf und Stiel, es dauerte in mir. Gebärdet euch, wie ihr wollt, das Meine abzuwehren,–ich stehe doch für euch. Das aber ists, daß ich zum Repräsentanten geboren und garnicht zum Märtyrer; für die Versöhnung weit eher, als für die Tragödie. Ist nicht Versöhnung und Ausgleich all mein Betreiben und meine Sache Bejahen, Geltenlassen und Fruchtbarmachen des Einen wie des Anderen, Gleichgewicht, Zusammenklang? Nur alle Kräfte zusammen machen die Welt, und wichtig ist jede, jede entwickelnswert, und jede Anlage vollendet sich nur durch sich selbst. Individualität und Gesellschaft, Bewußtheit und Naivität, Romantik und Tüchtigkeit,–beides, das andre immer auch und gleich vollkommen,–aufnehmen, einbeziehen, das Ganze sein, die Partisanen jedes Prinzips beschämen, indem man es vollendet–und das andre auch … Humanität als universelle Ubiquität,–das höchste, verführerische Vorbild als heimlich gegen sich selber gerichtete Parodie, Weltherrschaft als Ironie und heiterer Verrat des Einen an das Andre,–damit hat man die Tragödie unter sich, sie fällt dorthin, wo noch nicht Meisterschaft,–wo noch mein Deutschtum nicht, das in dieser Herrschaft und Meisterschaft besteht,–repräsentativer Weise besteht, denn Deutschtum ist Freiheit, Bildung, Allseitigkeit und Liebe,–daß sies nicht wissen, ändert nichts daran. (……)
Ich verachte sie unsäglich, weil ich das Produktive will, das Weibheit und Mannheit auf einmal, ein empfangend Zeugen, persönliche Hochbestimmbarkeit. Nicht umsonst seh ich dem wackren Weibe ähnlich. (……) So solltens die Deutschen halten, darin bin ich ihr Bild und Vorbild. Welt-empfangend und welt-beschenkend, die Herzen weit offen jeder fruchtbaren Bewunderung, groß durch Verstand und Liebe, durch Mittlertum, durch Geist - denn Mittlertum ist Geist - so sollten sie sein, und das ist ihre Bestimmung, nicht aber als Originalnation sich zu verstocken, in abgeschmackter Selbstbetrachtung und Selbstverherrlichung sich zu verdummen und gar in Dummheit, durch Dummheit zu herrschen über die Welt. Unseliges Volk, es wird nicht gut ausgehen mit ihm, denn es will sich selber nicht verstehen, und jedes Mißverstehen seiner selbst erregt nicht das Gelächter allein, erregt den Haß der Welt und bringt es in äußerste Gefahr. Was gilts, das Schicksal wird sie schlagen, weil sie sich selbst verrieten und nicht sein wollten, was sie sind. (Kap. 7.)
7. 제인 오스틴, 맨스필드 파크
작년부터 오스틴 소설을 틈틈히 읽어나가는 중이고, 맨스필드 파크는 세 번째 작품. 오만과 편견이나 이성과 감성과 같이 교외 중산층 한 가정의 바로 중심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저리에서 어쩌다 들어온 사람의 관점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만큼 더 신랄한 인상. 사실 읽은 지 두달 됐다고 많이 잊어버린 느낌인데 앞서 읽었던 두 작품에 비해 어쩐지 조금 힘들게 읽기 시작했다가 점점 더 속도가 붙었던 걸로 기억한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대로 둬야지 공연히 노심초사하느라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3부 12장)
8. 닐 피오레, 내 시간 우선 생활습관
미루는 습관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책. 독일와서 좀 많이 심각해진 증상이라 - 이 역시 사놓고 한참 미루다 - 밑줄 열심히 치고 요약정리까지 해서 읽어갔는데 아직도 이러는 것 보면 작가양반과 출판사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던듯. 다만 하기싫어미루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보통의 처방과는 약간 달랐다는 점에서 - 뭔가 미루는 본성을 인정하고 그걸 역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느낌? - 나름 참신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늘 그렇듯이 실천을 미루고 있어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