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zensionen

23년 2월에 읽은 책

Gruentaler 2023. 3. 24. 02:51


1. 알렉산더 클루게,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1123년 이후 이 도시에서 벌어진 모든 화재 목록을 도시 문서고에 요구했다. 그 리스트에는 1945년 4월 8일은 “잊혀져” 있었다. (121)

  
  어린 시절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고향에서 벌어졌던 미 공군의 폭격을 다룬 글. 장르는 뭐라 집어서 말 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경험과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항들은 문학적 기술로 적당히 가린(?) 르포로 봐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봤던 김태우의 폭격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같은 대상에 의한 대 민간인 무차별 폭격이었음에도 묘사되는 경험의 결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던 느낌이 들었다. 물론 두 저작의 분량이나 장르를 고려하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만.
  우선 폭격을 하는 이들과 당하는 이들 사이의 거리 문제. 부록에서 토마스 콤브링크가 밝힌 바대로 클루게는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처하는 극단적으로 방어 능력이 없는 상태 및 폭격기 비행단과 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하지 않은 부당한 관계"를 지적하면서, "주민들은 한 번도 항복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데 공격자와 공격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접촉은" 불가하며, 설령 가능했더라도 공격 주체와 이들이 지시를 받는 영국에 있는 사령부 사이의 거리 때문에 비행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211) 김태우의 책에서도 이 거리감은 중요한 문제로 작용하지만 그것은 폭격기 편대가 갖는 기계적으로 무차별적인, 어쩌면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야만에 가까운 잔인함을 나타내는 반면, 클루게의 경우 어딘가 종국에는 “잔인함이 일정 정도에 이르게 되면 누가 그것을 저질렀는지는 이미 상관이 없습니다. 잔인함은 그냥 그쳐야 한다”(122)라고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아마도 이 차이는 결국 폭격당한 대상의 경험에서 비롯하는 듯 싶은데, 한국전의 경우 민간인들이 - 특히 피난 중에 - 적으로 오해받아 희생되었다고 받아들인 것과 달리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이미 확실히 "이런 공습을 전쟁을 일으킨 사실에 대한 처벌이자 도시들을 먼저 폭격한 것에 대한 처벌로 이해"하였기에 책임 문제에서 그 폭격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고, 자신의 부당함을 고발할 수 있는 (어쩌면 한국전의) 희생자들과 달리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기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기 힘든 것"(토마스 콤브링크, 189)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추축국이었다 하더라도 일본의 폭격(나아가 원폭) 경험은 또 다른듯 싶고, 이후의 베트남전이나 최근의 이라크전, 또 나아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폭격 경험은 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보편적이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는 인상. 특히 이제는 드론을 통해 폭격 비중이 늘어나면서 두 당사자의 거리는 훨씬 더 벌어졌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오래 전에 읽어 부정확한 기억을 바탕으로 비교하다보니 말이 길어지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안하더라도 흔히 이런 주제의 글에서 있을 법한 폭격에 따른 큰 희생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심판 문제는 없지만, 폭격 후 잔해마냥 파편들과 같은 개개인의 에피소드들은 적은 분량임에도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게 한다.
 

  [아래로부터의 전략] “까맣게 구워지던” 4월 8일, 특히나 열기가 최악이었던 한밤중에 은신처에서 소망했던 것과 같은 전략적인 관점들을 열기 위해서는 1918년에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나라에서 그녀와 같이 결단력 있는 교사들 7만 명이 각자 20년 동안 열심히 수업을 진행했어야 했을 뿐 아니라, 지역을 초월해서 언론과 정부에 압력을 가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교양을 잘 쌓은 후손들이 왕의 홀이나 고삐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물론 홀이나 고삐는 전혀 전략적 무기가 아니지만, 이런 전략에 필요한 권력 획득을 표상하는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51)

 

  [대성당 광장 상황] 도대체 어째서 우리가 이 유화 몇 개와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책상들을 구해내야 한단 말입니까, 하고 도와주는 이가 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프리쉬마이어가 답했다. 글라임에 대한 기억입니다. (102)

 

   [이 사건들이 피아노 수업에 미치는 영향] 공습, “긴 동굴”로의 도피, 파괴된 도시로의 복귀, 피아노 연습을 하던 “신사용 방”이 있던 측면부 건물이 타서 집이 폭삭 내려앉았던 것과 같은 사건들의 연속은, 이미 손에 익은 손가락 기술이나 60페이지로 급히 넘어가고자 했던 지크프리트의 의지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 파울리는 자신의 파괴되지 않은 의지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던 슈피겔스베르겐 벡 길 끝에 있는 저택에서 그가 열심히 연습한 작품을 오랫동안 쳤는데, 크게 눈에 띄는 머뭇거림 없이 흔들리던 지점을 넘어 거의 끝까지 쳐냈다. 그는 이 부분에서 난해한 개별 박자만 따로 다시, 그 저택 집주인이 더는 듣고 싶어하지 않을 때까지, 두 시간을 연습하였다. (104-105)

 
2. 루이즈 페니, 빛이 드는 법

 
  전작에 비해 이야기 스케일이 상당히 커짐. 여기에 발맞추어 시리즈를 관통하던 갈등과 불안도 함께 해소되었고 우리 주인공도 새로운 장에 접어들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만큼 본연의 살인 사건은 오히려 뒤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전면의 훼이크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단정하고 넘어가도 되는 지는 또 모르겠다.  

  그가 알기로 스리 파인스는 끔찍한 상실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스리 파인스가 보유한 것은 면역이 아니라 치유하는 드문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과 브루넬 부부에게 제공한 것이 그것이었다. 치유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위로.
  하지만 평화처럼 위로는 숨거나 달아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았다. 위로는 먼저 용기를 요했다. (173-174)

  ...라기에는 솔직히 스리 파인스에서는 살인 사건이 김전일 급으로 벌어지지 않았나요...

3. 버지니아 울프, 런던 거리 해메기


  몇 년 전엔가 읽었던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에 -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방랑벽: 걷기의 역사(Wanderlust: History of Walking)"라는 원제를 이렇게 바꿔서 냈다니 정말 K-스타일이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을 따름이고 - 소개된 바가 있어서 작년에 찾아 읽었는데 어쩐지 별 느낌은 없었고, 얼마 전에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어봤다. 울프 소설이야 학부 수업 때도 몇 작품 읽어 봤고, 영화 디 아워스도 재미있게 봤었고 당장 작년에 읽은 책 다시 읽는 건데 뭔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인상에 비해 비교적 최근의 인물이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아마 전에 읽었을 때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렇게 오해한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울프를 처음 접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편도 아니니 이렇게 말하는 게 실례일 수도 있겠으나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우리가 아는 울프 일면들을 대략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 아닐까 싶음.

  새로운 방에 들어가는 것은 늘 모험이다. 그 주인의 삶과 성격에서 나오는 기운이 농축되어 방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서면 우리는 밀려오는 새로운 감정의 파도에 맞선다. (21)
  이 각각의 삶을 살짝 뚫고 들어가서 자신이 단 하나의 마음에 묶여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잠시 몇 분간 입어 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을 수 있으리라. (22) - 런던 거리 해메기

 

  실로 젊음의 상실을 알려 주는 징후의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그들과의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60)
  우리는 예술에 대해 본능적으로 아는 것 이상은 절대 알지 못할 수 있다. 예술을 오래 경험하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오로지 모든 기쁨 가운데 위대한 예술가들에게서 얻는 기쁨이 이론의 여지 없이 최고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65) - 서재에서의 시간

 

  익명성과 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 작가들이 가장 만족스럽게 글을 쓰도록 보호해 주는 이 두 가지는 오로지 중산층의 특권이다. 중산층에서 작가들이 탄생한다. (88) - 백작의 조카딸

 

  그들은 다른 성의 극단적 인습성에 가로막혀 저해됩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큰 자유를 허용하는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런 자유를 극도로 혹독하게 비난하는 것을 깨닫거나 억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136) - 여성의 직업



4. 무라카미 하루키, 이윽고 슬픈 외국어

  책에 실린 동명의 에세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타향살이 하는 사람에게 심금을 울린다고 해서 구해서 읽어보았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들에 더 공감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하긴 책에 실린 글들 모두 프린스턴을 비롯한 미국(동부)에서 지내면서 얻은 경험과 인상들을 바탕으로 했으니 안 그럴 수가 있나.
  유명한 이야기지만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바, 하루키는 진구구장 외야 잔디밭에서 야쿠르트 경기를 보다가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 업으로 삼았다고 하던데 생각해보니 나도 그냥 일상에서 뭔가 하다 문득 이제 정말 논문 써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몇 차례인가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인가. 당장 달리기라도 해야 할 지 아니면 한밭구장 외야석에라도 가봐야 좀 각성할 지 잘 모르겠다.
 

  정보가 감상을 앞서고, 감각이 인식을 앞서고, 비평이 창조를 앞선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피곤하다. (48)
  그런 유동성과 감각성을 묵살하고 담담하게 나의 길을 간다는 부분이 사회에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9) - 대학가 스노비즘의 흥망

 

  일본어로 소설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일본어를 상대화하는 것, 일본인이면서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성격을 상대화하는 것 - 나는 그것이 앞으로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5) - 버클리에서 돌아오는 길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었던 거야. 그것은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일 필요는 없어. 그저 아주 평범한 경험이어도 상관없지. 하지만 그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어드는 경험이어야만 해. 나는 학생 때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어. 뭘 쓰면 좋을지를 발견하기 위해 나에게는 칠 년이라는 세월과 힘든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226) - 롤 캐비지를 멀리 떠나보내고

  앞서 말한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부연 설명.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그럴지 몰라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295-296) -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위한 후기

 
 
  지난 달과 달리 흔히 말하는 굵직한 책은 제대로 읽지 못한 한 달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누가 뭐라할 사람은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긴 했다. 사실 현실 도피용도 없지는 않았는데 이젠 그마저도 안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