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gesendete Briefe

화낼 일은 아닌데 화가 나서 화가 났던 일

Gruentaler 2023. 6. 22. 00:30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번역한 책을 드디어 낸다는 연락을 출판사에서 받았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감감무소식이던 사이에 바뀐 편집자님 왈, 공역하신 선생님과 그 전 주말에 식사를 하고나서 연락을 하게 됐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묻혀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이 참에 마무리짓자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출판시장이나 업계가 날이 갈수록 안좋다 하더라도 책 한권 내는데 돈이 한두푼 드는 일이 아니니 이렇게까지 휘뚜루마뚜루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아무렴 어쩌면 좋으랴, 드디어 진행된다는 소식만으로도 반갑기 그지 없으니. 아무런 진척사항을 들은 바 없어서 속상해하니 주변에서는 학위 나올 때랑 맞춰서 나오면 이력서 쓸 때 그게 더 좋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좋게 생각하자, 하던 차였다. 물론 과연 학위를 받을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지만
  이런저런 인사말 다음에는 수정할 부분이 많다는 언급이 이어졌다. 관심이야 있었지만 출판을 염두에 두고 한 번역은 처음인데다 무엇보다 같이 작업한 선생님의 내공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비교될테니 그럴 수도 있다. 원래 언어실력과 감각은 처음 호되게 교정 보면 많이 는다고 동료 선배님께서 얘기해주신 터라 이것도 기회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연락부터 해서 편집/교정에서 출판까지 이르는 일정 대충 정하고 나서 1차 수정본을 받기까지 대략 주말 휴일 포함해서 대략 열흘 정도 걸렸고, 이 기간에 대략 4-5회 가량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거의 모든 이메일이 "내용도 그렇고 출판사에서 하반기 주력 저서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수정할 때 신경 좀 써달라"라는 말이 인사로 시작해서 도돌이표마냥 그 말로 마무리가 되었다. 한두번정도는 그러려니할텐데 짧은 기간 동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메일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라 그렇게까지 내 번역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혹시 성의없어 보였나까지하는 의심이 생겨서 또 자존감을 셀프로 깎아 먹었다.
  첫 번역인데다 번역 주선해주신 공역자 선생님께도 폐끼치고 싶지 않아서 나름 신경 많이 썼다. 틈나는대로 번역 관련 서적도 읽으면서 참고도 많이 했고. 그래도 실력이 부족해서 결과물이 좋지 않다면야 얼마든지 피드백을 받아들일 용의는 있으나 뭔가 끊임없는 당부(?)에 비해서 실제로 그만큼 신경써준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초고 마감일이 19년이라 실제로 그렇게 했고, 내가 맡지 않은 부분의 번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동안 한번 더 검토해달라고 하길래 주변에 도움도 받고 그래서 다시 보낸 게 20년이었다. 그동안 뭐하다가 이제와서 연말에 책 낼 계획이니 서두르자고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 신신당부할 정도로 손봐야 할 곳이 많다면 몇 달 안에 끝내자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일까. 일정보니 물론 내가 제때 잘 한다는 전제 하에서 교정은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과연 이 분들도 나를 그 정도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편집자 쪽에서 보내준 1차 교정본도 처음에나 조금 피드백하고서 그 뒤로는 맞춤법 말고는 손 놓아버린 느낌이던데. 무엇보다 작년 연말 출판사 대표 인터뷰에 올해 나올 중요한 책들 소개해달라는 말에 1도 언급 안된 것 보고 올해도 텄다고 생각했건만 한해 절반 다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하반기 주력 작품이라고 강조하는 걸 보고 약간 당황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래도 이 정도 일정을 세운 것 보면 우려의 말보다 번역 퀄리티가 실제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한편에서 살짝...
  ...라는 등등의 마음을 담아 장문의 편지를 일단 쓴 뒤, 혹시나 해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보통 있는 일인지, 출판사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닌지 물어보았는데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겠다만 그렇게까지 문제 있는 상황은 또 아니란다. 그래서 편지는 일단 접고 그냥 빨리 수정하고 털어내기로 마음 먹었다.
  ...라지만 아직도 이따금 울컥하기는 함. 사실 이런 일은 시간이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이지만, 하필이면 논문에 집중해야 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일이 일어나 안그래도 없는 자존감 더 떨어지다 보니 여기다 이렇게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