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유리벽 속의 수인, 그 외로움과 분노의 시절
정진홍, 유리벽 속의 수인, 그 외로움과 분노의 시절
나는 주어진 주제에 상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다.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직도 내게는 회상의 내용일 뿐 역사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내게 지금 비참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싹 없이 가난하고 또 영글지 못한 세월을 그 때나 이제나 숙명처럼 살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깊은 속에서부터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참 외로웠다. 깊이 외로웠다고 해야 옳을는지도 모른다. 똑똑하고, 잘나고, 당당하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친구들, 그리고 '서울 아이들', 그 틈에서 나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은 몰골로 허기를 메우러 세월만을 삼켜야 했었다. 숱한 페이지들 속에 깨알처럼 박혀있는 활자들. 그 속에 거꾸로 박힌 오식(誤植)된 활자, 그 활자의 외로움, 나는 그 묘사에 감동하여 키에르케고르를 탐했는지도 모른다.
교문을 나서다 버스값 20원이 아직도 호주머니에 있을 때면 나는 내 우울한 인생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혼자 웃었다. 그러나 1백 원, 2백 원이 내가 한 달을 견뎌야할 재산의 총량일 때면 나는 빵집에 들어가 1백 원어치 빵을 사 먹고, 다시 나와서 몇 집 건너에 있는 다른 빵집에 들어가 나머지 1백 원을 주고 또 빵을 사 먹었다. 그 헛헛한 포만감 속에서 어른거리는 시골집 내 누이들의 모습, 그러면 나는 자학(自虐)이라는 표현마저 사치스러워 눈을 질끈 감곤 했다.
실존주의는 우리의 거울이었고, 출구였고, 그래서 우리의 주문이었다. 그것을 읊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 사제들의 이름, 곧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등이 발언될 때면 우리는 경건한 제의에 참여하는 아픔과 희열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형들이 전장에서 돌아왔고, 그들이 아직 군복을 입은 채 니버의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탐독하는 모습은 실존의 주문을 이성의 논리에 의하여 침묵시키는 경이이기도 하였다.
서서히 전장의 재가 식어 가고 있었다. 전장의 포연과 인연이 멀었던 분들이 바다를 건너 금의환향하고 있었고, 그들의 특권의 누림이 부러운 친구들이 바쁘게 바다를 건너는 준비에 몰두해 갔다. 낭만이 움트고 있었다. 대학 앞, 염색 공장의 검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세느 강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투로 그 낭만은 조형되어 갔다. 종로 2가의 뮤직홀인 르네상스는 그 좁은 전면에 빼곡하게 전축판을 쌓아 놓고 우리의 메카임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법대생 최희준이 노래를 불렀다.
<사상계>가 읽혔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 옹의 글이 지가를 올렸다. 비판의 여유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민족이라는 언어가 고개를 들었다. 정치가 조심스러운 회의의 대상이 되어 갔다. 정의, 그 소박한 순수가 실존의 고독을 지양해 가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소리를 높였다. 박물관 앞에 있던 출석카드함을 없애겠다는 공약이 요란했다. 어떤 입후보자는 배고픈 친구에게 구호 물자인 치즈를 주고 표를 모았다. 서울, 지방의 이른바 명문고 출신들이 땅뺏기 협상도 했다. 운동장 한 구석에 스탠드가 세워졌다. 앨범을 만들겠다고 돈을 거두었다. 군복을 입고 돌아왔던 형들이 그 옷을 벗고 교문을 나서면서 우리를 '낙원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많은 것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九萬里斯下 五百年賢者生"이란 액자가 걸린 도서관은 항상 차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화인이 찍힌 책상에 앉아, 미8군사령부로 쓰였던 탓에 흰벽 여기저기에 전선이 통과했던 구멍들이 널려진 교실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물어야 했던 물음, 그러나 묻지 못했던 물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학문의 권위는 이견을 제기하지 못하는 규범으로 현존해 있었다. 주제가 되는 일이 학문하는 유일한 법도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동요의 조짐이 나타났다. <대학신문>에 이어령씨의 반김동리 논문이 <유리벽 속의 囚人>이라고 臍하여 발표되었을 때, 우리는 그 표제의 레토리에 쾌재를 불렀다.
문리대의 카리스마였던 신사훈 교수의 강의도 그것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강한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文理大學報>에는 학생들의 소박하고 현학적인 논문들이 도제의 담습을 거절하는 논리를 펴며 교수들의 논문과 더불어 발표되기 시작했다.
분명한 초연은 가시어지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외로움은 더 깊은 골을 파고 들었다. 나는 아직도 소외라는 개념의 用例를 외로움과 대치할 수 밖에 없는 고정 관념을 몸살처럼 앓는다. '있는 친구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하는 아르바이트 앞에서 생존을 씨름해야 했던 아르바이트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는 친구들'이 현란한 개념들을 구사할 때, 그들의 그러한 모습에 당혹해 할 수 밖에 없는 처연함이 또한 그랬다. '행동하는 친구들'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갈 때면 나는 내 발바닥 두 쪽을 세워 놓을 땅마저 지니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에 고뇌스럽기만 했다. '빽이 있는 친구들'이 논산훈련소를 뛰어넘고 바다를 건너고, 연민의 표정으로 나를 웃어 줄 때면 그 외로움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그랬다. 전장의 주변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으로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을 살던 우리는 그 재가 꺼지는 언저리에서 그런 것과는 다른 외로움의 현실을 살아야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범죄스러운 것이었던가. 기성이란 얼마나 타기해야할 허상이었던가. 그런데 어느 틈에 우리는 윌의 마당에서 한데 어울려 뒹군다고 여긴 친구들, 그 삶의 현실이 轟音을 내며 갈라지고, 마침내 외로움은 그 정서를 분노로 싹 틔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졸업을 한 달 남짓 남긴 어느 날, 나는 도서관 입구 아래층 방에서 맬 줄 몰라 사진사가 매주는 넥타이로 내 목을 두르고 졸업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내 대학의 세월은 끝났다. 나는 내 외로움을 그러한 儀禮로 목매어 버렸다.
그리고 스무 날 만에 4.19였다.
외로움을 넘어 분노를 胚胎하던 시절, 그런데 지금 내 역사의식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그리고 다만 회상의 내용 속에서 그 때 '있는 친구들', 그 때 '아는 친구들', 그 때 '행동하는 친구들', 그 때 '빽이 있는 친구들'이 여전히 그처럼 지금도 건재함을 현실로 확인해야 하는 또 다른 외로움이 나를 질식시키고 있다.
다시 무엇을 더 회상할 수 있으랴. 회상이 가능할 수 있는 현실의 잉여 속에서 짐짓 그 잉여의 교환 가치를 탐하는 '나이 먹은' 것에게 그 때의 의식을 지금 역사화하라는 강요는 너무 잔인하다.
그러나 그 강요가 지금 당신들의 특권이듯이 내일 당신들의 의무로 지워질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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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1학년 때 대학국어 교재에서 봤지만, 원래는 1990년 대학신문에 실린 글이라고 한다. 기억으로는 교재에 아마 각 시대별 학창시절 회고록을 묶어둔 단원이었고, 조금 더 앞 세대 글도 좋았는데 - 철학전공자로 전시연합대학 시절을 다뤘던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 지은이와 제목을 잊어버렸다. 본가에 대학국어가 남아있지 않는 이상 쉽게 확인을 못할듯. 그리고 어디선가 블로그를 하면 늘 긁어와서 올려두곤 했다가 여기서는 이제야(?) 올린다. 생각해보면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빽"은 없어도 어쨌든 "바다를 건"넜으니 외로움을 넘어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 뒤늦게 조심스러워졌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외로움을 넘어 분노를 배태"하고 있으니까.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