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zensionen

3월에 읽은 책

Gruentaler 2020. 4. 15. 06:02

 

 

 

 

 

1.  에드 맥베인, “살인자의 선택”

  사실 “살인자의 선택” 작품 자체만 봤을 때는 지금까지 읽어봤던 맥베인의 다른 87분서 시리즈 소설에 비해 각별하게 재미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피해자 주변 인물들의 관련 증언은 같은 사람에 대한 설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각양각색이고 모순적이어서 조사하는 경찰은 물론이고 독자도 혼란스럽게 만들 지경이다. 그렇지만 가해자의 동기가 피해자로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면만”을 (역자의 말, S. 268) 보았다는 점에서 비롯하였기에 사건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고 있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쉽게 풀린 것 같아 아쉬운 느낌을 지우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87분서”라는 전체 맥락에서 “살인자의 선택”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품의 의의가 있다. 시리즈 내 한 정규 멤버에 변화가 생겼고, 특히 이 작품에서 데뷔한 인물은 화려한 신고식까지 마쳤으니 연작물을 계속 찾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는지는 책 말미에 작가가 따로 밝혔는데, 그 과정도 시리즈 전채 맥락에서 보면 이 소설의 재미 아닐까 싶고. 시리즈 특유의 빠른 전개나 곳곳에서 드러나는 유머감각도 - 사실 읽고 난 뒤에 들었던 아쉬움은 역설적으로 이 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 여전했다.

 

2.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잘 알려져 있듯이 토마스 만의 필생의 역작으로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천재 작곡가의 일대기를 통해 독일(교양)인들이 어떻게 나치즘에 경도되어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인 작품. 신학에서 시작하여 음악(학)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논의는 사실 이쪽 분야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어도 따라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복잡하고 수준이 높다. 그럼에도 역시 이성적 작업을 통해 영혼에 호소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매체가 독일인들의 성향, 특히 자칫하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극단적으로까지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쉬운 그 성향을 잘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음악을 소재로 한 듯 싶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독일인만의 민족성에서 비롯한 것인가, 내지는 결과론적인 성찰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기도 했지만.) 실제로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는 특성에서 주는 음악의 효과를 잘 포착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려 했기에, 그런만큼 읽기 쉽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 전에도 나왔고 그 후에도 새로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한국에서 가져와서 읽은 책은 10년 전에 나왔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었고, 나오자마자 읽어본다고는 했지만 그 무렵에는 결국 두 권 중 한 권밖에 읽지 못했다. 한동안 엄두를 못내다 이제서야 어찌어찌 다시 붙잡고 읽기 시작해서 간신히 다 읽긴 했으나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는 솔직히 자신하기 힘들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3. 김대륜, 역사의 비교

 세계사/서양사 맥락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세계화와 자본주의, 제국과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이 어떻게 생겨서 발전했고 그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유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용이나 스타일 면에서 대학교 교양수업 듣는 학부생 수준에 맞춘 글이다보니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기에 비교적 빨리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서양사를 공부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할 수 밖에 없을테고, 그에 대한 답이라 볼 수 있을듯. 

 

4.   한동일, 라틴어 수업 <E-Book>

 한동안 화제가 됐던 인문학 힐링(?) 대중교양서. 속된 말로 라틴어 수업 중에 경구 하나 인용해서 썰(?)을 푼 내용인데 사실 이정도 스토리면 과연 본연의 어학 수업이 진행되기는 했을까 하는 의심도 살짝 들었다. 그런데 뭐 강의자/필자 당신께서 애초에 그런 어학 수업을 지양했다고 하시니. 

 그럼에도 단순히 수업시간에 종종 나올 법한 옆길로 새는 재미있고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특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움과 위로가 될 만한 내용들이 있어서 마음을 다시 잡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덮고 나서 또 잊어버리니 그게 문제지만. 책에서도 이야기 되고, 아마 라틴어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이게 바로 “있어 보이려고” 시작한 라틴어 공부가 주는 매력이라면 매력일려나. 라고 중급 라틴어 재수강해서 학점 떨어진 사람이 말해봤자......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나를 ‘숨마 쿰 라우데’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Lectio VI - 각자 자기를 위한 ‘숨마 쿰 라우데’)
하루의 결과야 어떻든 우리는 그날그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도록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꾸준히 자기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겁니다. 
 자신의 공부 리듬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지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해야 해요.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우겨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Lectio VII -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는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매듭을 짓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해줍니다. 어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보는 연습을 해보라고요. 공부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잘 마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는 것, 그것이 결국은 힘이 되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일 겁니다.
 어쩌면 삶이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만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준비 속에서 좀 더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서 자아실현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요? (Lectio VIII - 캐사르의 것은 캐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분노를 잠시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길 기다려보는 것이죠.  (Lectio XVII - 이 또한 지나가리라!)

 

5.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근대 초 유럽의 거부 야콥 푸거의 일생을 다룬 책. 푸거야 유럽사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니 특별히 새삼스러울 게 있나 싶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 이상으로 잘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을듯 싶고, 실제로도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푸거라는 인물을 소개한다는 동기에서 쓰인만큼 푸거의 일생을 쉽게 조망하기에 좋은 책. 유럽의 패권을 둔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가문의 경쟁, 성속의 경쟁, 그리고 종교 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라는 혼란상에서 푸거가 당대 위기와 기회를 마주하여 어떻게 부를 축적하였는지, 또 그 순간에 내린 그의 선택이 유럽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근대 초 유럽사의 많은 국면에서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역시 - 아마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 근대적 감각과 중세적 심성을 동시에 지닌 복잡한 인물이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6.  W. G. 제발트, 캄포 산토

  제발트의 산문과 에세이집. 제발트의 책은 이미 접해봤음에도 여전히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짧은 산문이나 에세이라서 소설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 까 싶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간 경우인듯. 전후 독일 문학을 다룬 평론 내지 에세이가 다수 있는데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우리가 ‘모범적’으로 여겼기에 주류가 된 관점에서 비롯한) 성찰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도 해명되지 않는 임의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고 움직이며,  측정할 수도 없이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느껴지지도 않는 한줄기 바람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에 의해, 누군가의 눈에서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인파를 뚫고 전해지는 시선에 의해 결정적인 순간 방향이 바뀌는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과거를 되돌아볼 때조차 우리는 실제로 과거가 어떠했는지, 어찌하여 이런저런 세계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진리에는 과거에 대한 아무리 정확한 지식도 얼토당토않은 한마디 주장보다 더 가까이 가닿지 못한다. - 아작시오를 짧게 다녀오다,  S. 20-21
 (프랑스 독문학자이자 레지스탕스 활동가였던) 피에르 베르토는 삼십 년 전에 이미 인류의 변화를 내다보면서, 기억과 보관과 유지는 주거지의 밀도가 낮은 시대에만, 즉 우리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많지 않은 데 반해 공간만은 넉넉했을 시대에만 삶의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반면 누구든 한 시간이면 족히 타인에게 갈 수 있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사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구 과잉에 기여하는 20세기 말 도시의 삶은, 불필요한 것을 지속적으로 내다버리는 것으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 모두, 가령 청소년 시절, 유년 시절, 출생, 선조와 조상을 남김없이 잊는 것으로 귀착된다.  (......) 그러면 우리는 기억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느 현재를 살아가면서, 또 아무것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면서, 종국에는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또는 가끔씩이라도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조차 품지 못한 채 삶 자체를 놓아버리게 되리라. - 캄포 산토, S. 42-43
 노사크는 다른 지면에서 이렇게 썼다. “만에 하나 내가 나 자신의 운명을 결단내기 위해서 억지로 이 도시의 운명을 불러들인 것이라면, 나는 도시의 몰락에 죄가 있다고 일어나서 자백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의 양심 탐구는 생존자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 즉 자신이 “희생자들에 속하지 않는다는” 부끄러움에서 비롯된바, 이는 이후 서독문학의 도덕적 차원의 근간이 될 것이었다. (......) 문제는 파괴 경험과해방 경험의 모순을 해소하려면 죽음의 약속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데 있다. 죽음 심상은 (......) 재앙 이후 독일 민족이 갖게 된 심리적 기질에 관해 상술했던, 국민 전체가 실패한 집단 애도에 대한 은유다.  S. 92-93
 그러므로 기억과 더불어 그 안에 간직된 객관적 정보를 전수하는 임무는 기억의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갈 각오가 된 사람들에게 위임될 수 밖에 없다. 기억이 위험한 이유는 기억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은 망각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기 때문이다.  - 역사와 자연사 사이 S. 100-101
 바로 여기에서, 어두운 과거가 있는 정치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 건립에 선행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의지는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질서의 존립 여부는 과거를 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승자와 동일시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S. 121
 (......) 신생 공화국을 대표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예컨대 리히터, 안더쉬, 뵐)은 선량한 독일인의 신화를 선전하는 데 급급했다. 그 신화란 바로 선량한 독일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갈 때까지 견디는 것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믿음이다. 이렇게 유포된 옹호론의 핵심에는 수동적 저항과 수동적 협력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는 허구가 놓여 있다.
 그 결과 착한 독일 남자가 폴란드 여자 또는 유대인 여자와 ‘만나는’ 연애담으로 포장된 수많은 1950년대 문학에서 부담스러운 과거는 대부분 감정적이라기보다 감상적으로 ‘청산됐으며’ 동시에 - 미처리히가 논문에서 어느 환자의 사례를 들며 논평한 대로 - 파시즘 체제의 희생자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회피하고자 절박하게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 문학에서는 실제 피해자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애도하려는 진정성 있는 시도를 전달하지 못하는 전통적인 서술 형식을 고수하게 한다.   S. 121-122
 사회적 노동분업 체제하에서 도덕적 난제를 담당하는 작가라는 존재는 집단적 양심에 시달리는 자라는 것. -  애도의 구축 S. 137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문단이 종용했던 집단적 망각을 이제는 비난하고 나서면서 도덕적인 이득을 취했다는 것, 이 경이로운 효율성을 목도하면서 장 아메리와 같은 진짜 당사자들은 다시 한번 부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  S. 172
 이런 만큼 아메리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기형화된 사회의 파렴치함을 비난하고, 마치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은듯 역사가 순조롭게 계속 굴러갈 수 있다는 추문을 고발한 유일무이한 사상가가 되었다. S. 180-181
  아메리의 작가적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면모는 그가 저항의 힘의 진짜 한계를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처럼 부조리할 만큼 지독스럽게 저항했다는 점이다. 저항, 저항의 효력을 믿지 않지만 모든 것을 불사한 저항, 피해자와의 근본적인 연대감에서 우러나온 저항, 역사의 조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의 저항, 그것이 아메리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그 철학은 주지하다시피 프랑스에서 나온 실존주의와 연계된 것이었지, 아메리가 기회주의적이고 천박하다고 느꼈던, 전후 독일 문화가 선전한 자기 변호적인 실존주의와는 절대 무관하 것이었다. 아메리가 사르트르를 바라보며 지지했던 실존철학적 입장은 역사를 용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독일 전후문학에 명약관화하게 누락되어 있던 차원인, 지속적인 항거의 필요성을 몸소 보이는 것이었다. S. 182-183
 아메리는 자신이 겪는 현 갈등 상황의 “도덕적 진리”가 화해의 태세보다는 불의의 부단한 단죄에서 발견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가운데, 자신의 응어리진 마음을 그 지표로 받아들이고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부조리 편에 선다.  - 밤새의 눈으로 S. 183
 문학의 소용은, 아마도 어떤 인과적 논리로도 해명할 수 없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단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까. S. 285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 재건 시도 S. 287 

 

7.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

  임진왜란과 오키나와, 훗카이도를 비롯해서 멀리는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근대 이전에 치른 대외 원정들이 대중 문학 등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그 변천사를 다루는 책.  그리고 대외 원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이른바 중국의 <화이사상>이 일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고, 즉 일본 역시 다른 중국 주변 국가들이 가졌던 소중화 의식을 바탕으로 <화>를 어지럽히는 주변의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정벌>로  자신들의 대외 전쟁을 정당화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벌>은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를 무력으로 교화해야 한다는 공격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거꾸로 자신들을 침입해온 <이>들에 맞서 싸운다는 수비와 반격의 - 나아가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한 선제공격이라는 -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히 공격과 방어의 논리는 동시에 드러나기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이 논리에 따라 소재들은 강조, 과장되거나 반대로 축소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근대화 이후 일본이 대외 팽창하는 데 필요한 논리나 심성을 제공하는 데도 일조하기도 했다.  

 책에서는 임진왜란을 다루는 부분이 상당 정도를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자체의 경험만으로 만들어졌던 임진왜란이라는 이야기의 틀에 중국과 한국측 문헌의 수용을 통해 바뀌어 갔던 경험이 덧붙여지면서 이후 원정 관련 문헌 생성에도 적지 않게 그대로 반영됐던 이유가 커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전공 관계자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일본 역시 임진왜란의 주체였는데 그쪽도 자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있었을 것이고, 물론 자기 관점에 따라 편집하긴 했지만 중국과 한국측 관점도 훗날 수용하여 바꿔나갔다는 점은 읽으면서 새삼스럽지만 참신한 충격을 준듯. (그렇다면 반대의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중국이나 한국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을까?) 

 

8. 해리 G. 프랭크퍼터, 개소리에 대하여

 이른바 ‘개소리(Bullshit)’에 대한 짧은 성찰. 사전적 정의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보통 흔히 헷갈릴 법한 '거짓말'이라는 것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 때문에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경각심을 갖지 않는지, 마지막으로는 오늘날에 유난히 개소리가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와 같은 문제들을 성찰한다.  짧고, 생각보다 읽기 쉬우며, 특히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본래 그 뜻을 상실할 정도로 남발되고 있는 현실에서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 (하지만 역자 해설은 잘 나가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점에선 책의 내용을 잘 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왜냐하면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라는 데 있다. 이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짜 또는 모조가 어떤 측면에서는 (진짜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의 사물에 비해 열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다른 면에서 단점일 필요도 없다. (......) 위조품에서 잘못된 점은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이다. 이것은 개소리의 본질적 속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근본적인 양상을 시사한다. 비록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관심 없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꼭 거짓일 필요는 없다.  S. 49-50
 그(개소리쟁이)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S. 58-59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S. 63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신뢰할 만한 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성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이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실재에는 사물에 대한 진리로 간주할 만한 본래적 속성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데 전념했다. 이것은 마치 사실에 충실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그 대신 개인들은 자신에 대해 충실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S. 66-67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로 드러났다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옳은 기술과 틀린 기술이 모두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우리의 본성은 사실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실체가 없다. 다른 사물들에 비해 악명 높을 정도로 덜 안정적이고 덜 본래적이다. 그리고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S. 67-68

 

9. 김진영,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고 김진영 선생이 수 년 전 발터 벤야민을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모아 정리한 강의록. 벤야민의 생애에서 시작하여 벤야민의 사상을 주요 개념과 저작들을 중심으로 해설하고 있다. 특히 근대와 그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가 지금 어떤 위험에 처해있으며 벤야민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에서 찾아내려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파리 같은 대도시나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이를 탐구하려는 그의 지적 탐구 여정을 비교적 쉬운 말로 상세하게, 그리고 밀도있게 풀어 나간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 상황에서 벤야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성찰도 포함해서.

 사실 벤야민은 전공과 직접 관련이 없는 관계로 수업에서든 관심차원에서든 몇몇 텍스트를 읽어본 적이 있는 수준에서 그친 정도라 많이 접해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읽은 벤야민 책 중에서는 (벤야민 입문자가) 읽기에는 가장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 작년에 읽었던 벤야민 평전을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 사실 이 책은 책 자체보다는 번역 문제가 크겠지만 - 없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