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좀 틈나는대로 열심히 읽었던 것 같은데 두 권이 전부였던 8월이었다. 의외인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틈나는대로 뭔가 사제끼기만 했던 한 달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무지성 사제끼기는 다소 궁핍했던 9월이나 숨통이 조금 트였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
최근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중 하나가 편집자 K인데 공교롭게도 8월에 읽은 책 두 권 모두 여기서 언급된 책들이었다. 자고로 독서중독자들은 남이 추천해준 책들 그냥 따라 읽는 법이 없거늘... 하지만 그만큼 좋은 책들이었다.
1.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그녀를 지키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천재 조각가 미모와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한 귀족 출신 비올라의 평생에 걸친 헌신과 우정...이라고 쓰면 사실 좀 어딘가 뻔해 보이는데 아무튼 그런 진부한 이야기는 아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간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때로는 (주로 미모가) 흐름에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주로 비올라가) 맞서기도 하면서 그 헌신과 우정을 갈등과 긴장 속에서 힘겹게 지켜나가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 올해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뒤늦게 정리해서 쓰려니 그게 잘 안된다. 아무튼 굉장히 재미있고 잘 쓴 소설.
나는 피에트라달바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내가 세상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가르쳐 줬던 가장 소중한 행위를 했다. 나는 일어섰고, 걸었다. (Ch. 24)
“넌 여자들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비토리오가 중얼거렸다.
“물론 우리도 그렇지. 그런데 그 폭력은 우리 자신을 향해. 누군가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지만, 우리가 들이마시고 우리를 중독시키는 이 폭력을 어디에선가는 분출해야 할 테니까.”
“삶의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Ch. 33)
악의 아름다움은 바로 악이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결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저 악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Ch. 42)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 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그랬다, 나의 형제들. 그날 폐허 속에서, 나는 깨달았고 나는 보았다. 당신들은 내게 화해를 위한 피에타상을 주문했었다. 그리스도의 망가진 육신을 안고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하지만 봐라. 만약 그리스도가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자가 아니겠는가. (Ch. 51)
2. 짐 디피디,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가장 어두울 때의 사랑에 관하여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으로 향하던 모든 비행기들이 들어오지 못한 채 내릴 곳을 찾아야 했고, 유럽에서 오던 비행기들 일부는 캐나다 동부의 시골 마을에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안에도 테러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염려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찾아온 이들을 매우 따뜻하게 환대했고, 어렵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인류애를 지켜나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책.
비행기에 내린 사람들이나 이들을 맞이한 사람들이나 모두 성인군자들은 아닐 것이고, 오히려 그런 상상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3일 만에 일단 마무리가 될 수 있었기에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이만한 선의를 선뜻 내주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특히 테러 이후 25년이 지나면서 호의를 베풀고 받는 게 더 어려워진 것 같으니. 그런만큼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다.
테러범이 서구 사회의 허약함을 드러내려 공격을 감행했다면, 갠더에서 일어난 일은 반대로 강인한 면모를 증명해 냈다. (머리말)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갠더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째 날 9월 12일 수요일)
갠더에는 증오도 분노도 공포도 없었다. 오직 공동체 의식만이 살아 있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동등하고, 누구나 똑같이 대접받았다. 인간애가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왕성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넷째 날 9월 14일 금요일)
뉴펀들랜드인은 단지 연착된 항공기 승객을 받아 주기만 한 게 아니라 머나먼 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수백 명에게 안식처를 주었다고, 온 세상이 위태롭게 느껴질 때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다섯째 날 9월 15일 토요일)
어쨌거나 갠더는 살기 안전한 곳이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이웃과 가까이 지내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제는 16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비극이 자기 삶과 어떻게 직결되는지 알게 되었다. 온 세계가 마을로 왔을 뿐 아니라, 세계의 문제도 함께 다가왔다.
그 엿새 동안, 갠더 시민은 뉴욕과 워싱턴에서 발생한 일에 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노력을 들여 승객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그러다 보니 사건에 대한 반응도 지연되었다. 새 친구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더해, 뒤늦게 찾아온 스트레스가 여러 방면으로 표출되었다. (여섯째 날 9월 16일 일요일)
"최악의 순간에도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있어요." 다이앤이 말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스스로 고립되지는 않았으면 해요.”"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가 생각하며 모두들 충격과 공포에 빠져 있을 때 저희는 희망을 품을 기회를 얻었어요.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한 행동이 어디까지인지 목격할 수 있었죠.
갠더 사람들이 인간적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갠더에서 일어난 일은 여전히 특별하다. 갠더가 마법 같은 공간이라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마다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재난 앞에서 한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든 똑같이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9.11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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